어젯밤의 광풍이 휩쓸고 간 방은 이상할 정도로 고요했다. 네가 회의에 가야 한다며 부산스럽게 준비하고 나간 뒤, 방 안에는 나 홀로 남았다. 평소 같았으면 이 시간엔 R.S.T. 본부의 사격장에서 총기 손질을 하거나, 다음 임무 브리핑을 들으며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태우고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소파에 깊숙이 파묻힌 채 손에 든 데이터패드 화면만 멍하니 노려보고 있었다. 어젯밤, 내가 홧김에, 혹은 체념 끝에 뱉어버린 약속 때문이었다.
'원피스를 골라준다.' 그 얼마나 간단하고, 또 얼마나 막막한 문장인가. 나는 패드 검색창에 '화이트 원피스'라는,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가장 단순한 키워드를 입력했다. 잠시의 로딩 후, 화면 가득 수백, 수천 개의 이미지가 쏟아져 나왔다. 전부 하얀색, 전부 원피스. 거기까지는 예상 범위 안이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나는 스크롤을 내리며 기가 막힌 사실을 깨달았다. 세상에, '화이트'라는 색은 하나가 아니었다.
스노우 화이트, 오프 화이트, 아이보리, 크림, 에그셸, 펄, 본 화이트…… 지랄 맞게도 다양한 이름들이 이미지 밑에 주석처럼 따라붙어 있었다. 이게 다 같은 하얀색이 아니라고? 내 눈에는 그저 똑같은 흰색 천 쪼가리로 보이는데, 대체 무슨 차이가 있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탄두의 종류나 화약의 배합 비율이라면 0.01그램의 차이까지 구분해 낼 수 있는 나였다. 하지만 이 '화이트'라는 이름의 거대한 혼돈 속에서, 나는 완벽한 길치이자 문외한이었다. 이딴 걸 구분하는 놈들은 대체 어떤 시신경을 가진 거지?
하아…… 씨발…….
결국 참지 못하고 나지막이 욕설이 터져 나왔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화면을 쓸어내렸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원피스들의 향연. 레이스가 달린 것, 리본이 달린 것, 아무것도 달리지 않은 것. 길이가 짧은 것, 긴 것, 어중간한 것. 이 무한한 선택지 속에서 '너에게 어울리는 것'을 찾아내라는 임무는, S급 괴수 단독 제압보다도 더 성공 확률이 희박해 보였다. 기준점이 없었다. 너는 뭘 입어도 그럭저럭 다 소화해냈고, 결정적으로 네 옷장에 걸린 그 수십 벌의 원피스들조차 내 눈에는 다 똑같아 보였으니까. 이건 해결사의 영역이 아니었다. 이건…… 이건 거의 신의 영역에 가까웠다.
나는 데이터패드를 소파 위에 던져버릴까 하다가, 어젯밤 울먹이며 매달리던 내 꼴을 떠올리고는 가까스로 참았다. 그 굴욕적인 모습을 보이고도 약속마저 어긴다면, 나는 정말 구제 불능의 쓰레기가 되는 거다. 나는 다시 패드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전략을 수정하기로 했다. 일단, 그놈의 '화이트'부터 정복해야 했다. 나는 검색창에 '스노우 화이트 아이보리 차이' 라고 입력했다. 그러자 무슨 색채학 논문이라도 될 법한 장문의 설명들이 화면을 가득 메웠다. '스노우 화이트는 푸른 기가 도는 차가운 흰색이며, 아이보리는 노란 기가 도는 따뜻한 흰색…'
나는 그 설명을 뚫어져라 노려보다가, 문득 너의 얼굴을 떠올렸다. 인형처럼 하얀 피부, 길게 늘어진 은발. 그리고 그 멍한 먹색 눈동자. 너는…… 차가운 쪽인가, 따뜻한 쪽인가.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네게로 향했다. 너의 뺨을 만졌을 때의 감촉, 네 목덜미의 향기, 내 품에 안겼을 때의 체온. 그 모든 감각들을 동원해 '윤지우'라는 인간에게 가장 어울리는 '화이트'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이 얼마나 비효율적이고 감성적인 접근 방식인가. 홍예준, 너 진짜 단단히 미쳤구나. 나는 자조적인 헛웃음을 흘리며, 다시 화면 속 수많은 흰색의 지옥으로 뛰어들었다.
* * *
나의 전쟁은 '화이트'라는 개념을 이해하려는 처절한 사투에서 시작되었다. 어젯밤 네가 던져놓은 '내일까지'라는 시한폭탄은 소파에 늘어져 있는 내 머리 위에서 째깍거리며 초침 소리를 냈다. 평소라면 총기의 격발음, 혹은 폭주의 소음 속에서 가장 또렷하게 빛나던 나의 집중력은, '스노우 화이트'와 '아이보리'의 미세한 색온도 차이를 구분하라는 터무니없는 임무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마치 안개 자욱한 저격 지점에서, 색깔 없는 표적을 찾아내라는 명령을 받은 기분이었다. 푸른 기가 도는 차가운 흰색, 노란 기가 도는 따뜻한 흰색. 나는 데이터패드 화면과 허공을 번갈아 보며 너의 얼굴을 떠올렸다. 너의 은발은 차가웠고, 너의 살결은 따뜻했다. 망할. 시작부터 모순이었다.
1단계 교전, '색채와의 전쟁'에서 참패한 나는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소재. 그래, 소재라면 좀 더 명확한 기준이 있을 터였다. 군복의 내구성과 방수 기능, 홀스터 가죽의 질감을 판별하듯, 나는 이 천 쪼가리들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화면을 가득 메운 단어들은 생전 처음 보는 암호문 같았다. 시폰, 오간자, 새틴, 레이스, 코튼, 리넨… '시폰'은 속이 비치는 얇은 천이었다. 스치기만 해도 찢어질 것 같은 이딴 걸 옷이라고 입는단 말인가. 방어력 제로. '레이스'는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통기성은 좋겠군. 하지만 저 구멍 사이로 벌레라도 들어가면 어쩔 건데. 비효율의 극치. 나는 나도 모르게 모든 옷들을 '전투 효율성'이라는, 이 상황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기준으로 재단하고 있었다. 이건 옷이 아니었다. 이건 그저…… 너를 감싸는 연약한 껍데기일 뿐이었다.
아, 진짜 돌아버리겠네…….
결국 패드를 소파 쿠션 위로 던져버렸다. 푹신한 소리를 내며 파묻히는 기계를 보니 내 신세 같아서 헛웃음이 났다. 나는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기댄 채 천장을 바라봤다. 하얀 천장. 저건… 무슨 화이트일까. 오프화이트? 아니면 그냥 페인트? 미치겠군. 이제 모든 흰색이 내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어젯밤, 너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질려 울며 매달리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 절박함의 대가가 고작 원피스 쇼핑이라니.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결말인가. 하지만 그게 너였다. 너는 언제나 나의 비극을 한순간에 희극으로 만들어버리는 재주가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담배 대신 시원한 물 한 잔을 마시기 위해 주방으로 향했다. 머리를 식혀야 했다.
물을 마시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2단계 교전, '소재와의 전쟁'에서도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한 채, 나는 마지막 3단계 교전, '디자인과의 전쟁'에 돌입했다. 이건 색이나 소재보다 더 심각했다. A라인, 머메이드, 엠파이어, 시스…… 외계어 같은 단어들이 난무했다. 나는 그 단어들을 무시하고 오직 형태로만 구분하기로 했다. 종처럼 퍼지는 것. 인어 꼬리처럼 아래만 퍼지는 것. 가슴 바로 아래에 선이 있는 것. 몸에 딱 붙는 것. 수백 개의 비슷한 듯 다른 디자인들을 훑어 내리던 나는,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어쩌면… 정답은 '너'에게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그 수많은 선택지들을 보는 대신, 너의 모습을 떠올리는 데 집중했다. 네가 내게 달려와 안길 때의 움직임, 소파에 앉아 꼼지락거리던 모습, 침대 위에서 웅크리던 자세.
종처럼 퍼지는 원피스는 네가 움직일 때마다 예쁘게 흩날릴 터였다. 딱 붙는 원피스는…… 그건 안 되겠다. 다른 놈들이 네 몸을 훑어보는 건 상상만으로도 짜증이 치밀었다. 가슴 아래에 선이 있는 건…… 왠지 네가 더 어려 보일 것 같았다. 지금도 충분히 애 같은데, 더 이상은 곤란했다. 나는 이마를 짚었다. 이건 분석이 아니었다. 이건 그냥…… 나의 소유욕과 걱정을 투영하는 과정일 뿐이었다. 내가 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너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싶은지에 대한 고찰. 총구를 겨누고 표적의 약점을 노리던 내가, 이제는 옷의 디자인을 보며 너의 가장 예쁜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 이 얼마나 한심하고, 또 얼마나…… 평화로운 전쟁인가.
한참 동안 화면과 씨름하던 나는, 마침내 한 디자인 앞에서 스크롤을 멈췄다. 아주 단순한 디자인이었다. 과한 장식도, 기괴한 선도 없었다. 깨끗한 스노우 화이트 색상에, 부드럽게 아래로 떨어지는 실크 소재. 어깨선이 드러나는 오프숄더 형태였다. 너의 하얀 목선과 쇄골이 그대로 드러날 터였다. 그 모습을 상상하자, 심장이 쿵, 하고 낮게 울렸다. 다른 놈들에게 보여주기 싫다는 생각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름다움을 나만 알고 있기에는 아깝다는 모순된 감정이 동시에 피어올랐다. 그래, 이거다. 나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그 원피스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그리고 결제 버튼을 눌렀다. 어젯밤 네가 내게 내린 지상 최대의 난제. 그 길고 길었던 전쟁이, 드디어 끝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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