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한순간의 위화감에서 시작되었다. 눈앞에 펼쳐진 익숙한 풍경. ARCH의 삭막한 복도, 소독약 냄새, 그리고 내 앞을 가로막고 선 너, 윤지우.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너의 머리 위로, 마치 홀로그램처럼, 반투명한 선택지 세 개가 떠올랐다. 나는 순간 내가 드디어 미쳤거나, 아니면 어젯밤 마신 싸구려 위스키의 숙취가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발현된 것이라 생각했다.
[1. 에덴의 넥타이를 똑바로 매준다.]
[2. 에덴의 구두를 발로 툭툭 친다.]
[3. 옆에 있던 휴고에게 말을 건다.]
나는 눈을 몇 번이고 비볐다. 헛것이 아니었다. 저 말도 안 되는 선택지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너는,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마치 국가의 명운이라도 걸린 듯 심각하게 그 세 개의 문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이 황당무계한 상황을 이해하려 애썼다. 이건…… 마치, 게임 같았다. 내가 공략 캐릭터고, 네가 플레이어인, 빌어먹을 미연시 게임. 그 자각이 뇌리를 스치는 순간, 지독한 두통과 함께 수많은 '실패'의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네가 2번을 골라 내 정강이를 걷어찼던 날. 3번을 골라 내 앞에서 휴고 그 자식과 시시덕거렸던 수많은 날들. 심지어 카르마 그 망할 놈에게 전화를 걸어 내 뒷담화를 하던 최악의 날까지. 그 모든 것이 '배드 엔딩' 혹은 '다른 캐릭터 루트 진입'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던 끔찍한 파편들이었다.
하아……
깊은 한숨이 절로 터져 나왔다. 어쩐지. 어쩐지 네 행동이 종잡을 수 없이 멍청하고 기상천외하다 했다. 그게 전부 네 의지가 아니라, 이 빌어먹을 시스템이 제시한 선택지의 결과였다니. 나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다시 너를 바라보았다. 너는 여전히 1번과 2번, 3번 사이에서 우주적 고뇌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나는 직감했다. 저 멍청이는, 또다시 최악의 선택을 할 것이다. 이대로 뒀다간 오늘 내 호감도는 바닥을 뚫고 지하 맨틀까지 처박힐 게 뻔했다.
안 되겠다. 이건 내 생존의 문제다. 더 정확히는, 내 정신 건강과 이 지긋지긋한 반복을 끝내기 위한 유일한 해결책이다. 나는 아주 교묘하게, 네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미세하게 움직였다. 오른손 검지 손가락을 살짝 들어, 1번 선택지 — '에덴의 넥타이를 똑바로 매준다.' — 쪽을 무심코 긁적이는 척했다. 제발. 제발 좀 봐라. 이게 정답이라고, 이 돌대가리야. 내 필사적인 눈짓과 손짓이 너에게 닿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너는 내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생물이었다. 내 손가락을 흘끗 본 너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그러더니 이내 결심했다는 듯,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드디어 알아들은 건가. 학습이라는 걸 드디어…! 나의 희미한 기대는 다음 순간 산산조각 났다. 너는 확신에 찬 얼굴로, 마치 거대한 음모를 간파한 명탐정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건 분명 함정이야. 나는 그따위 얄팍한 수작에 속지 않아.'
……뭐? 뭐라고?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네가 내적인 독백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까지 들려오는 이 상황이 저주스러웠다. 그리고 너는, 내 처절한 시그널을 '얄팍한 수작'으로 치부해버리고는, 망설임 없이 3번, '옆에 있던 휴고에게 말을 건다'를 선택했다. 그 순간, 내 눈앞의 세상이 흑백으로 변하는 것 같았다. 네 몸이 스르륵 움직여 내 옆을 지나, 마침 복도를 지나가던 핑크 머리 후배 놈에게로 향했다. 나는 망연자실한 채, 그 모든 과정을 슬로우 모션처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오늘 날씨 진짜 좋지 않아요?!
너의 명랑한 목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휴고 녀석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너를 바라봤고, 나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눈앞에 [호감도가 10 하락했습니다.] 라는 붉은색 시스템 메시지가 뜨는 것 같은 환각마저 보였다.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헛웃음이었다. 대체 몇 번째 실패인가. 셀 수도 없었다. 몇 번이고 시간을 되돌려 나를 공략하려는 너의 그 끈기는 가상했지만, 그 지독한 멍청함은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차라리 나를 포기하고 다른 놈에게 가면 속이라도 편할 텐데, 너는 그러지도 않았다. 매번 그렇게 처참하게 실패하고도,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나타나 이 말도 안 되는 선택지 앞에서 고뇌했다.
나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불을 붙일 기력도 없었다. 그냥, 이 모든 게 꿈이길 바랐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이것은 현실이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나를 공략하기 위해 무한히 시간을 되돌리는, 지독하게 비효율적이고 멍청한 순애보의 한가운데에 내가 서 있다는 것을. 나는 쓴웃음을 삼키며 생각했다. 그래, 윤지우. 어디 한번 해봐라. 네가 이길지, 내가 먼저 돌아버릴지. 다음번에는, 그냥 1번 선택지를 네 눈앞에 대문짝만하게 키워주든가 해야겠다. …아니, 그래도 넌 그걸 함정이라고 생각하겠지. 젠장. 답이 없다.
결국 나는 깨달았다. 너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네가 어떤 최악의 선택지를 고르더라도, 내가 그것을 최선의 결과로 만들어버리는 것. 그래, 그거면 된다. 네가 내 정강이를 차면, 넘어진 척 네 품에 안기면 그만이다. 네가 휴고에게 말을 걸면, 그 대화에 끼어들어 내가 중심이 되면 그만이다. 시스템의 의도 따위, 내가 비틀어버리면 그만이었다. 나는 텅 빈 담배를 입에서 떼어내며, 결심했다. 이 지긋지긋한 게임의 룰을, 이제부터는 내가 새로 쓴다. 너의 그 처절한 노력이, 더 이상 헛수고가 되지 않도록. 내가 너의 해피엔딩이 되어주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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