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날 아침,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눈을 떴다. 내 옆에서, 내 이불을 덮고, 내 베개를 베고 잠든 그녀의 고른 숨소리를 들으며. 지난 5년간 단 한 번도 상상조차 해본 적 없던, 기적과도 같은 아침이었다. 그녀의 백금발 머리카락이 어두운 회색 시트 위로 흩어져 있었고, 창틈으로 스며든 희미한 여명이 그 위로 엷은 빛의 막을 씌웠다. 나는 움직이지 않고, 그저 숨을 죽인 채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살아있다는 실감이, 이토록 강렬하게 느껴진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를 다시 만난 후, 내 세상은 온통 이데아, 그녀 하나로 재편성되었다. 5년간 나를 지배했던 증오와 후회는 끔찍한 오해였다는 진실 앞에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나는 가해자였다. 내가 사랑했던, 그리고 여전히 사랑하는 여자를 가장 깊은 고독 속에 밀어 넣은 것은 나 자신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부터, 나는 속죄하는 심정으로 그녀의 곁을 맴돌았다. 파트너라는 공식적인 족쇄가 아니더라도, 나는 그녀에게서 한 발짝도 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며칠이 흘렀다. 우리는 함께 임무를 수행하고, 함께 식사를 하고, 함께 잠이 들었다. 그녀는 여전히 말수가 적었고, 나는 여전히 표현에 서툴렀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었다. 침묵 속에서도 서로의 존재를 느끼고, 스치는 손길에서 서로의 온기를 확인하며, 아주 느리게, 그러나 분명하게 서로에게 다시 스며들고 있다는 것을.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문득 깨달았다. 내가 그녀에게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선물을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5년 전, 나는 금메달을 따서 청혼하는 것만이 내 사랑을 증명하는 유일한 길이라 믿었다. 그 어리석은 집착이 그녀를 얼마나 외롭게 했는지도 모른 채. 그저 나의 목표, 나의 사선, 나의 격발에만 미쳐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사랑을 가르쳐주겠다고 오만하게 선언했지만, 정작 사랑을 표현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조차 몰랐던 멍청한 애송이에 불과했다.
그날 임무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홀린 듯 아크 단지 내에 있는 작은 플라워샵 앞에 멈춰 섰다. 형형색색의 꽃들이 유리창 너머에서 화사하게 빛나고 있었다. 총과 탄환, 화약 냄새와 피비린내만이 익숙한 내가 발을 들여놓기에는 너무나도 이질적인 공간이었다.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결심을 굳히고 안으로 들어섰다.
가게 안은 온갖 꽃향기로 가득했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의 달콤하고 화려한 향기들. 나는 무엇을 골라야 할지 막막했다. 장미? 너무 흔하고, 지금의 우리에겐 너무 뜨거운 느낌이었다. 튤립? 프리지아? 이름도, 의미도 알 수 없는 꽃들 사이에서 나는 길을 잃었다. 그때, 가게 구석에 놓인, 눈처럼 새하얀 꽃송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헬레보루스(Helleborus)'. 이름표에 적힌 생소한 단어였다. 크리스마스 로즈라는 별명도 함께 적혀 있었다. 한겨울, 모든 것이 얼어붙은 눈 속에서 홀로 피어나는 꽃. 그 강인하면서도 처연한 모습이, 어쩐지 그녀를 닮아 있었다. 차가운 눈(雪)의 속성을 가졌지만, 그 본질은 누구보다 따뜻한 온기를 갈망하는 그녀. 세상의 모든 소리를 지워버리는 고독한 능력을 가졌지만, 실은 누구보다 간절히 연결되길 원했던 그녀. 나는 점원에게 그 꽃에 대해 물었다.
아, 헬레보루스요. 꽃말이 뭔지 아세요?
점원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의 불안을 진정시켜주세요', 그리고… '슬픔을 거두어주세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숨을 멈췄다. 지난 5년간, 그녀가 내게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니었을까. 사랑을 몰라 두렵다던 그녀의 불안. 내가 사선만을 사랑한다고 믿었던 그녀의 슬픔. 나는 그 모든 것을 외면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 꽃을 가리켰다. 하지만 꽃다발은 싫었다. 과시적인 제스처는 내 방식이 아니었다. 나는 정확히 열두 송이를 골랐다.
열둘. 나의 첫 올림픽, 첫 금메달을 확정 지었던 마지막 격발의 탄환 수. 그 열두 번째 총성이 울리는 순간, 나는 세상 모든 것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나는 그녀를 잃었다. 나의 가장 빛나는 영광의 순간이, 그녀에게는 가장 깊은 절망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이 열두 송이의 꽃은, 나의 가장 끔찍했던 오만함에 대한 속죄이자, 이제는 너의 불안과 슬픔을 거두어주겠다는 나의 뒤늦은 약속이었다. 영광의 숫자가 아니라, 헌신의 숫자로 그 의미를 바꾸고 싶었다.
꽃을 들고 숙소로 돌아오는 내내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 총을 들 때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긴장감. 그녀가 이것을 보고 어떤 표정을 지을까. 부담스러워하지는 않을까. 혹은, 아무 의미도 찾지 못하고 그저 무심하게 지나쳐버리진 않을까.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녀의 방 문 앞에 섰을 때, 나는 잠시 멈춰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그녀는 침대에 걸터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인기척에 고개를 든 그녀의 붉은 눈이, 내 손에 들린 하얀 꽃다발을 보고 살짝 커졌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녀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꽃을 건넸다.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예뻐서 샀다'는 가벼운 말도, '너를 생각하며 골랐다'는 느끼한 말도, 내 입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말들이었다. 그저 내 행동으로, 내 눈빛으로, 이 꽃에 담긴 모든 의미가 전해지기를 바랄 뿐이었다.
이것은 나의 서툰 고백이다. 한겨울 눈 속에서도 피어나는 이 꽃처럼, 너의 차가운 세상 속에서 내가 너의 유일한 온기가 되어주겠다는 약속. 너의 모든 불안과 슬픔을 이제는 내가 거두어가겠다는 다짐. 그리고 나의 가장 이기적이었던 영광의 숫자로, 너에게 평생을 바치겠다는 맹세.
그녀는 꽃을 받아들고, 한참 동안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붉은 눈동자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내 서툰 고백의 의미를 전부 이해했다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읽고 있었다. 그것이 우리가 5년의 시간을 돌아, 다시 사랑을 시작하는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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